천보총(天步銃.cheonbochong)

1.천보총에 관한 댓글

참포수 2019. 9. 22. 06:40

이강현님의 천보총에 관한 댓글을 여러분들이 보시기 편하게 본문으로 올렸읍니다.


이강현

  • 2019.07.08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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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동안 참포수님께서 답글을 주셨음에도 이렇게 늦게 대답하게된 점에 먼저 사과를 드립니다.
    수술을 받게되어 그동안 참포수님께서 저에게 질문해주신 천보총에 대한 답을 지금에서야 드리게되었으니 먼저 그점에 대하여 사과드리겠습니다.

    먼저 천보총이라는 것이 기록되어있는 자료들을 풀어가고 현재에도 그 유물들이 남았는지에 대하여 풀어가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가 자료들을 기반으로 내세운 가설에 불과하기에 언제든지 궁금하신점이라던가 반론을 하고싶으신 부분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해주십시요.

    다음은 승정원 일기에서 가져온것입니다.

    영조 1년 을사(1725) 12월 27일(경인) 맑음
    이집이 군기시(軍器寺)의 관원이 전하는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병기(兵器)에서 기능이 좋기로는 조총(鳥銃)보다 나은 것이 없지만, 군중에서 사용하고 있는 총은 화력(火力)이 미치는 거리가 100보(步)에 불과합니다.

    신이 들으니 옛날 숙종조에 박영준(朴英俊)이라는 사람이 천보총(千步銃)을 만들어 바쳤다고 합니다.
    신이 박영준의 아들인 박지번(朴枝蕃)에게 두 자루를 시험 삼아 만들게 했더니 통용되고 있는 총에 비해서 조금 길고 무겁긴 했지만 현저하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또 이달 19일에 노량진에서 습조(習操)할 때에 시험 삼아 쏘아 보게 했더니 1000보에는 미치지 못해도 거의 900여 보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실로 전에 없는 무기이며 성을 지키는 데에 더욱 긴요하게 갖추어야 할 것이어서 신이 북도(北道)의 폐단에 대해 조목조목 아뢸 때에도 이것에 대해 대략 덧붙였으니, 이번에 만든 총 두 자루를 감히 이렇게 봉진하여 성상께서 살펴보시도록 갖추었습니다.

    올 여름 삼남(三南)의 월과 조총(月課鳥銃)의 경우에는 천보총으로 대체하여 만들어서 나누어 보내도록 묘당에서 결정하였으니, 이것은 앞으로 사목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관서(關西)와 관북(關北) 두 도는 본래 변경을 수비하는 중요한 지역이어서 무기를 더욱 특별히 마련해야 하는데, 얼핏 들으니 두 도의 월과 총(月課銃)을 매년 서울에서 사들여서 책임만 때워서 비치한다고 하니 정말로 한심합니다.

    이 두 도에도 삼남에 시행한 예에 따라 무고(武庫)에서 천보총을 만들어서 나누어 보내고 총값은 각 읍의 정식(定式)이 본래 있으니 규례대로 올려보내게 하소서.

    다만 관서의 경우에는 감영에서 각 읍의 월과 총의 값을 거둔 뒤에 그 잉여분을 가져다가 다른 곳에 보태 쓴다 하니, 이는 잉여분을 제하고 올려보내도 감영에는 손해나 이익이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또 들으니 관서와 관북 두 도에 속한 각 읍의 화약도 상인들에게 사들여 대충 채워서 비치하기 때문에 화력이 너무 약해서 바로 폐기되는 물건이 된다고 하니, 변통해야 할 듯합니다. 천보총의 연환(鉛丸 납으로 만든 탄환)은 일반 총의 탄환과는 다르니 이들 두 가지 물건은 삼남의 월과 약환(月課藥丸)의 규례대로 무고에 값을 바치도록 한 뒤에 일체로 마련하여 보내는 것이 실로 사리에 맞을 듯합니다.

    제때 거행할 수 있도록 조총의 약환가(藥丸價)를 속히 올려보내라고 관서와 관북 두 도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
    .
    .
    .
    영조 5년 기유(1729) 9월 12일(계미) 맑음

    윤순이 아뢰기를,
    “신이 비국에 둔 회계(回啓)했던 상소를 죽 훑어보았더니, 그중에 윤필은(尹弼殷)의 상소가 많았습니다. 그가 한 말 중에는 쓸 만한 것도 있고 쓸 수 없는 것도 있었는데, 모두 나라를 위한 정성에서 나온 것으로 일을 잘 알고 있는 것도 많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은 본래 상소하기를 좋아하는데, 지금 나이가 틀림없이 많을 것이다.”
    하자, 윤순이 아뢰기를,
    “나이가 많은데 뜻이 쇠하지 않았고, 소장(疏章)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습니다. 현재 수어청에 소속되어 있는데, 그가 만든 천보총(千步銃)은 몸체가 작고 매우 가벼우며 만듦새가 자못 이상하여 쇠지팡이처럼 생겼습니다. 시험 삼아 4자루를 만들어 순성(巡城)할 때 들판에서 쏘니 과연 탄환이 1000보(步) 넘게 나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혈총(三穴銃)과 만듦새가 같은가?”
    하니, 윤순이 아뢰기를,
    “그것과 다릅니다만, 매우 가볍고 편리하며 철환(鐵丸)이 멀리 가기로는 다른 조총이 비할 바가 아닙니다. 훈련대장이 그것을 보고 그 모양대로 많이 만들고 싶어 하였습니다. 먼저 몇 자루를 들여서 상께서 보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에게 한번 쏘아 보게 하시거나 무예별감에게 시험해 보게 하신 뒤에 각 군문에 내려 주어 그 모양대로 만들어서 두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윤필은이 연전에도 진법(陣法)에 대해 상소하였다. 나도 이 사람이 뜻이 있는 사람이고 재주가 쓸 만함을 안다.”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그는 말이 거칠고 보잘것없지만 병기에 관한 것은 공을 아주 많이 들여 자못 기교(技巧)가 있습니다. 불러서 그가 병기를 만든 이유를 물으니, 답하기를 ‘제가 만든 기계(器械)가 만약 세상에 쓰인다면 저승에 가서 어미를 볼 낯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의 어미가 이런 일에 힘을 쓰라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에게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강현                              

    2019.07.08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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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만기요람이라고 하는 18~19세기 조선왕조 재정과 군정에 대한 책이 있는데,
    재정편과 군청편중, 군청편 군기목록에 있는 총들입니다.

    훈련도감
    행용총(行用銃) 7,946자루 가운데서 4,438자루는 군병에게 나누어 준다. ○ 별조총이 154자루이며 장조총이 50자루인데 그 가운데서 삼층화문(三層火門) 1자루, 대조총(大鳥銃) 56자루, 동사대조총(銅絲大鳥銃) 32자루, 흑골(黑骨)조총 1자루이다.천보총(千步銃) 4자루, 마상총(馬上銃) 205자루

    금위영
    조총 13,638자루[柄] 8,465자루는 경군과 지방군에게 나누어 준다. ○ 대조총 2자루, 중장조총(中長鳥銃) 8자루, 별조총 1,027자루, 왜조총 1자루, 호(胡) 별조총 49자루, 마상총 1자루ㆍ삼합총(三合銃) 4자루, 유불랑기(鍮佛狼機) 1자루ㆍ자포(子砲) 5개ㆍ철불랑기(鐵佛狼機) 1자루ㆍ자포 5개(箇).천보총(千步銃) 4자루

    어영청
    조총 6,488자루[柄] 1,167자루는 경군과 지방군에게 나누어 주고, 100자루는 개정한 규례에 의하여 병조로 이송한다. ○ 왜조총(倭鳥銃) 14자루ㆍ별장총(別長銃) 48자루ㆍ대장총(大長銃) 1자루ㆍ대총(大銃) 2자루ㆍ당조총(唐鳥銃) 1자루ㆍ황자총(黃字銃) 1자루ㆍ승자총(勝字銃) 2자루ㆍ동조총(銅鳥銃) 1자루ㆍ마상총(馬上銃) 1자루ㆍ호제총(胡製銃) 30자루 ㆍ단총(短銃) 598총(叢) 2기(枝) 299총ㆍ3지 299총 ㆍ천보총(千步銃) 1자루[柄]




     이강현

    2019.07.08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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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승정원 일기와 만기요람의 기록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하니 몆가지 특징을 알아냈습니다.

    1)천보총은 숙종조에 처음 개발되었다.
    2)영조 실록에 기록된 천보총의 제작은 박영준의 아들인 박지번이 해내었다.
    3)천보총은 기존의 장조총들과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4)천보총 말고도 조선군에는 여러 종류의 화기들이 있었다.
    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 기록들과 1872년 어영청에서 1자루가 있었다는 자료를 대입해 봤을때 천보총은 생각보다 많은수가 만들어지지않은 상태로 있었으며 그나마 남아있던 천보총도 점점 사라졌다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그렇게되니 현재 천보총이라는 유물을 확인할수가 없다는 것은 이미 조선 시대부터 그 수가 많지 않았고 조선 후기 신식무기들로 인한 기존 전장식 화기 처분, 일제의 1907년 총포화약류 단속법실행으로 인한 압류, 왜정 말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천보총이라는 이름을 단 27정의 화기와 함께 1610점의 조선 병기들을 공출,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로 인한 국토 황폐화 및 조선 유물들 소실 혹은 해외유출등 유물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면 최악의 환경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조선군의 화기에 대한 저의 고민입니다.
    위의 만기요람과 실록에서는 기존에 알려진 조총의 이름들과 다른 총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조총(大鳥銃), 대장총(大長銃), 중장조총(中長鳥銃), 대총(大銃), 단총(短銃),
    삼층화문(三層火門), 동조총(銅鳥銃), 동사대조총(銅絲大鳥銃),
    흑골(黑骨)조총, 마상총(馬上銃), 삼합총(三合銃), 호(胡) 별조총, 별조총(別鳥銃),
    별장총(別長銃), 왜조총(倭鳥銃), 당조총(唐鳥銃), 호제총(胡製銃), 평총(平銃),
    장총(長銃), 조취총(鳥嘴銃), 소조총(小鳥銃)등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유물로 확인한 조총들은 단총, 소조총, 동조총, 마상총, 왜조총, 호제총, 평총등으로 다른 조총들은 본적도 들은적도 없습니다.

    특히 호제총과 호별조총들은 이름 앞에 '오랑캐 호'자가 붙은 총기들은 시대적인 상황을 감안할때 중국에서 전래된 총기라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중국 화승총은 크게 세가지로 나뉘는데,
    첫번째는 오스만 튀르크에서 전래된 화승총이며,
    두번째는 파랑국(포스투칼)에서 전래된 화승총(서양),
    세번째는 자체개발 화승총기 입니다.
    첫번째와 두번째 화승총기들은 교역으로 얻은것이지만, 세번째 화승총기는 다릅니다.
    명나라에서 자체 개발한 화승총으로 전장식 총기와 다른 후장식 장전 방식의 화승총기입니다.
    구조는 불랑기 포에서 영감을 얻어서 조사정이라는 명나라 사람이 만든 것으로 불랑기포의 구조를 따서 만든것이라 상당히 졍교하고 가격또한 비싸서 적은수만 만들어지고 명나라 멸망이후 자취를 감춘 총기입니다.

    그래서 중국 화기사에 영향을 준것은 위의 오스만 튀르크에서 온 총기와 서양에서 전래된 총기만이 현재남아있습니다.

    그 총기들이 조선 화기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유물중 하나가 바로 참포수님께서 올리신 조선 조총 기증식 사진의 총기입니다.
    위 총기는 일본 철포의 특징을 가졌지만 일본 철포에도 없는 특징을 몇가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을 보았을때 저는 비로소 일본 철포의 부분과 중국 화승총의 특징들이 조선에서 융합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 총기를 천보총이라고 생각하고 기술한 자료들을 봤습니다만
    저는 이 총기가 장조총 혹은 중장조총류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위에 제가 풀어간 조선 화기들의 이름안 해도 그 수가 21가지가 되고 길이 혹은 크기로 분류한 화기만하더라도 그수가 8가지 정도가 명시되어있습니다.

    특히 대조총(大鳥銃), 대장총(大長銃), 중장조총(中長鳥銃), 대총(大銃), 장총(長銃)등 길다는 의미를 가지면서 길이를 나타내는 한자인 '길 장'자를 넣은 화기도 상당수 존재하기에 현재 알려진 것보다 조선 화기사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하여 참포수님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강현님!
    먼저 몸이 안 좋았다니
    문안부터 드립니다.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도저히 난해(難解)하고,
    혼돈 스럽고,     궁금 하던 중
    이렇게 정리하신 내용을 보니 너무 고마워 감사 부터 드리며,
    앞으로 조금씩 궁금한 점 이야기 나누어 보 도록 했으면 합니다.
    우선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답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참! 다시 댓글을 보다가 언급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다시 글을 적습니다.

    실록과 달리 승정원 일기에서는 천보총과 관련된 인물이 세명이 나옵니다.

    첫번째 인물은 숙종조에 처음으로 천보총을 만들었다는 박영준.
    두번째 인물은 영조대에 인물로 박영준의 아들인 박지번
    세번째 인물은 같은 영조대 사람인 윤필은입니다.

    이 세명이 천보총 개발사에서 언급된 이름들로 박영준과 박지번의 천보총의 설명과 윤필은의 천보총 설명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박영준의 아들인 박지번의 천보총을 승정원 일기에서는 "통용되고 있는 총에 비해서 조금 길고 무겁긴 했지만 현저하게 다르지는 않습니다."라고 설명하였고,

    윤필은이 만든 천보총의 묘사에서는 "몸체가 작고 매우 가벼우며 만듦새가 자못 이상하여 쇠지팡이처럼 생겼습니다. "라고 묘사하였습니다.

    즉, 박영준과 박지번의 천보총은 기존 화기의 모양새와 구조가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윤필은의 천보총은 기존 화기들과는 다른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는 것으로도 설명이 됩니다.

    이것을 식으로 풀이해보면,
    박영준-박지번 천보총 = 사거리 증가, 기존 화기들보다 조금 무겁고 길다.
    윤필은 천보총 = 사거리 증가, 기존화기들 혹은 기존 천보총보다 가볍고 짧은 전장을 가졌다.
    라는 식이 성립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두종류의 천보총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따라서 천보총에 대한 또다른 문헌정보 혹은 실물 유물이나 사진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확실하게 천보총이 어떻게 생겼다라고 확답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참포수님께 제가 알고있는 천보총에 대한 정보와 저의 가설을 말씀드렸습니다.
    폐가 되지 않으시다면 앞으로도 조선 조총에 대한 토론을 이어가고 싶습니다만,
    그럴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이강현님!
    유익한 자료 고맙습니다.
    우선은 모양새 인데, 저의 좁은 생각 또는 편협한 소견으로는 말씀하신 박영준(朴英俊) 선인(先人),                
    윤필은(尹弼殷) 선인(先人) 두분 모두의 말씀이 옳다고 봅니다.

    시대적 상황으로 봐서 남방의 영향을 받았느냐? 섬의 영향을 받았느냐?의
    문제로 해석 해 봐야 되지않을까?를 생각 해 봅니다.
    앞으로 많은 자료 공유 부탁드립니다.^^
    답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참! 참포수님께 여쭙고 싶은것이 있습니다.
    포수를 재현하실때 죽관을 재현해놓으셨던데, 어떤 기준으로 재현하셨는지와 어떻게 만드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사실 제가 조선군 포수를 재현하려고 하는데 모형이지만 환도와 장난감 조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릅 수술을 받게 되어 오구, 주화약통, 점화용 화약통, 죽관을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4년동안 3번이나 수술을 받고 양쪽 무릅을 수술하게된 후유증인지 지금도 몸상태가 좋지 못하여 기존에 제작하던 환도와 장난감 조총을 제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시나마 앉아서 할수있는 제작품을 생각해보다가 죽관이 떠올라서 참포수님께 어떤 자료를 바탕으로 제작하셨는지에 대하여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지금도 몸은 좋지 않지만 계속해서 제 머리속에는 조선 조총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서 제작을 하고픈 욕구가 나날히 올라가고 있습니다.

    만약에 폐가 되지 않으시다면 제가 만든 장난감 조총을 평가해주실수 있을지 여쭙고 싶습니다.
    이메일 주소만 주시면 수술 받기전까지 제작하면서 중간마다 찍어둔 사진들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강현님!
    그렇지 않아도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bibful@daum.net
    연락 하시면 됩니다^^

    bluelake께서 천보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이분 주변을 잘 찾아보면 유익한 글들이 많아요!
    http://www.koreanarchery.org/punbb/viewtopic.php?id=261
    참포수님께서 올려주신 사이트를 가보았는데 외국분께서 작성한것이지만 내용이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
    이런 자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
    이분의 주변을 시간있을때 다시 한번 보세요! 너무나 가까이 계세요! 그리고 참고 할 자료 많아요^^
    참포수님,
    제가 아는 분과 이야기를 하다가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해서 천보총의 기록을 알게되었습니다.

    [금성정의록 갑편 10월-21일]기록들을 살펴보면,
    진시(辰時, 오전 7∼9시). 즉시 행군하면서 정탐병의 보고를 계속 접하니 적도(賊徒) 700여 명이 광주(光州) 침산(砧山)에 주둔하여 진을 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소라를 불며 군을 재촉하여 포를 쏘고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나아가 하나의 과녁을 둘 만큼 떨어진 곳에서 먼저 돌격하라고 영을 내렸다. 포수(砲手) 강춘삼(姜春三)이 대완포(大碗砲)를 쏘고 천보총(千步銃)을 연발하여 일제히 적을 죽이니 저항하던 적은 머물지 못하고 포와 총을 버리고 각각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지니 남은 자가 없었다. 마침내 적진(賊陣)을 빼앗아 적의 깃발과 포를 빼앗고 본부(本府)에 승첩을 보고하였다. 또 군사 장비를 수습하여 장대(將臺)로 수송하고 평민을 효유하여 예전과 같이 편안히 있도록 하였다.
    이때 접응장(接應將) 손상문(孫商文)·박재구(朴在九)·구유술(具有述)·김학술(金鶴述)·전학권(錢學權) 등이 관군에 실수가 있을까 하여 포군 100 명을 거느리고 기치를 크게 펴서 조릿대처럼 둘러싸며 왔는데 위성(威聲)을 더욱 떨쳤다. 군대의 호궤(犒饋)가 끝나고 광주(光州)와 선암(仙巖) 등지를 멀리 바라보니 적도(賊徒) 수만 명이 강변에 열진(列陣)하여 기를 세우고 포를 쏘며 성세(聲勢)를 과장하였다.

    라고 명시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천보총은 어떤 형식을 가졌는지는 모르고 있으나 적어도 동학농민운동 당시 정규군에서 사용된 것을 알수 있습니다.
    역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시군요!
    이런 기세로 전진(?)한다면, 곧 천보총의 실체가 밝혀질것은 명약관화 합니다.
    보고 계시는 분들도 동참하여 이문제를 해결해 보심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