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승총(火繩銃)과 조선군(朝鮮軍)의 장비

6.이강현의 조총소고(鳥銃小考)

참포수 2019. 9. 8. 12:45

이강현의 조총소고(鳥銃小考)

최근에 온 이강현씨의 멜을 또 다시 소개 할 기회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조선 조총 유물을 조사하던

중에 상당수의 유물들이 총신만 남은 상태로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저는 나무가 썩어서 그 흔적이 없어졌다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렇다면 그 주위에 방아쇠와 용두등 여러 부속품들이 함께 발견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렇게 서종락 의병장의 화승총 유물 사진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조총의 총신이 부식으로 인해서 남은 것이 아니라

일부러 총신만 따로 때서 숨겨두었을 가능성이 있지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상당히 재밌는 이야기가 시작이 됩니다.

 

190796일 총포화약취체법(銃砲火藥取締法)이 공표되고

민간의 무기류들을 수거 및 몰수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선에는 너무나도 많은 무기들이 풀려있어서 집계가 안 될 정도 였습니다.

그렇기에 각 집안을 완전히 뒤지는 것은 불가능했고

이에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병기류들을 집안에 숨겨두게 됩니다.

가령 집 지붕이라던가 아니면 흙 담장, 집 밑, 집 흙벽 사이 등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걸리지 않도록 무기들을 숨겨두게 되었습니다.

집에 숨겨두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사실과 유물은 참포수님의 유년시절 조총과 '서종락 의병장 화승총' , '군산 근대역사 박물관의 화승총'등으로 이외에도 옛날 신문을 살펴보니 집을 허물다가 여러 조총 유물들이 발견되었다는 기사와 사진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조총 자체를 숨기려니 너무나도 크기가 컸습니다.

그래서 조총의 총가는 장작으로 사용하고 조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총열만 숨겨두었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그 상태로 일제강점기와 일제의 패망, 신탁통치, 6.25 동란등 여러 격동의 시기를 보내는 동안 숨겨둔 무기들이 잊혀지고 소실되었고,

그래도 끝까지 살아남은 무기들이 현대에 들어와 발견되고 발굴되었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추론들을 통하여 제가 세운 가설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1. 190796일 총포화약취체법(銃砲火藥取締法)이 실행되면서 민간의 무기들을

   압수하는 과정에서 일부 사람들이 압수를 피하여 병기류를 숨겨두었을 가능성.

2. 위의 과정에서 조총에서 가장 중요한 총열을 후에 총가와 여러 부속품들을

   다시 제작 할 것 을   감안하고 총열만 보관하였을 가능성.

3. 이러한 과정에서 여러 역사적인 사건들로 인하여 잊혀진 무기류들이

   현재에도 조선시대 당시부터 존재한 가옥들과 담장에 묻혀있을 가능성.

 

그러나 이는 가설에 불구하기에

여러면에서 미흡한 점이 많으며 일반화해서는 안되는 가설입니다.

이러한 가설을 세울 때 참고한 기록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먼저 민간에 조총 소지가 가능하였다는 기록을 참고한 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2425]

..."도감(都監)의 군기(軍器)는 변란을 겪은 뒤에 아주 없는데,

근래 저자에서 산 것은 겨우 2백여 자루의 조총뿐입니다.

 

쌀을 마련하여 지금 더 사들인다면 많은 수량을 장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쌀을 지급하여 사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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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이미 인조대 당시에 저자에서 조총을 구매 할수 있을 정도로 민간 기술자가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국조보감 제46- 숙종조 6 [숙종 9(계해, 1683)]

...“호남의 속오군(束伍軍)으로서 스스로 조총(鳥銃)을 구비한 자에게는 복호(復戶) 1결을 주고 조총이 없는 자에게는 50()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술년에 감축할 때에 스스로 조총을 구비한 자에게 50부를 주는 것으로 감하였고

조총이 없는 자는 완전히 삭감하였습니다.

 

대개 애당초 조총이 희귀했기 때문에 백성을 모집하여 복호를 주어서 스스로 조총을 구비하게 하였던 것인데, 지금은 경외에서 제조하여 숫자가 넉넉하여 나누어 줄 수 있으니 복호를 주는 규례를 일체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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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숙종 9110]

 

....민유중(閔維重) 등이 또 말하기를,

"호남(湖南)의 속오군(束伍軍)으로서 스스로 조총(鳥銃)을 갖춘 자에게 복호(復戶) 1()을 주고, 조총이 없는 자에게는 50()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술년의 재감(裁減) 때에 조총을스스로 갖춘 자는 50()로 감하였고,

조총이 없는 자는 제감(除減)하였습니다.

 

대개 당초에 조총이 희귀(稀貴)함으로 인하여 백성을 모집하여 복호(復戶)를 주어서 스스로 갖추게 하였던 것이나, 지금은 경외(京外)에서 타조(打造)하는 것이 나누어 주기에 넉넉합니다. 그러니 복호(復戶)를 주는 규칙(規則)을 모두 혁파(革罷)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 뒤에 민유중(閔維重)이 호서(湖西)에도 이 규칙이 있다 하여 또 임금께 아뢰어서 이를 혁파(革罷)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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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들은 속오군이 만약 스스로 조총을 구해서 올 결우 세금을 감하는 법령이 이제 조총 수가 넉넉하니 이 법령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로, 이는 '군인이 스스로 조총을 구해서 오는 것이 가능하고 그리하면 세금도 감해준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는 국가에서 조총을 넉넉하게 구하지 못하였을때 제정한 법령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위의 인조실록 기록과 함께 보면 민간에서 활발하게 조총이 거래가 되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조선왕조 실록 숙종 111010] 숙종 11121

비변사(備邊司)에서 청()나라 사람이 전한 백두산(白頭山)과 영고탑(寧古塔) 사이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을 만났는데 조총(鳥銃)을 많이 가지고 있더라는 말로 함경도(咸鏡道)의 남병사(南兵使)와 북병사(北兵使)로 하여금 비밀히 기찰(譏察)하여 주문(奏問)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11121]

.....마침내 다시 통사(通事)를 불러서 주상께서 대답할 말을 묻게 하고는 중서를 시켜 붓을 들어 이를 썼으니, 거기에 이르기를,

"소방(小邦)이 오랫동안 태종 황제(太宗皇帝)와 세종 황제(世宗皇帝)의 은혜를 입었기에 종전(從前)에는 범월하는 일이 있었지마는,

번번이 관대(寬大)한 은전(恩典)을 입었으므로 매양 감격하였습니다.

이제 변경(邊境)의 백성들이 법금을 범하면서

몰래 범월하여 조총(鳥銃)을 쏘아 관인(官人)을 상해하였습니다.

이는 과인이 털끝만큼이라도 만홀(慢忽)한 마음이 감히 있었던 것은 아닌데도,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금령(禁令)이 엄하지 못한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황제의 칙서를 받드니 황송(惶悚)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쓰기를 마치자 통관(通官)이 우리 나라 말로 전언(傳言)하여 차오(差誤)가 없는가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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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숙종대 당시 청나라 영고탑 부근의 조선인들 상당수가 조총을 들고 다닌다는 기록과 조선의 심마니들이 국경을 넘었다가 관리에게 들키자 관인에게 조총을 쏘아 다치게 하였다는 기록입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영고탑의 조선인들은 일반 백성들도 상당하였는데 그들도 조총을 휴대하였다는 의미이며,

심지어 심마니들도 조총을 들고 다녔을 만큼 민간에 조총이 존재하였다는 의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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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기록에서 한가지 가설을 세웠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반도에는 무시무시한 맹수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한반도는 국토의 70% 이상이 산지이며 서울도 뒤에 인왕산과 북악산을 끼고 있어서 궁궐에 호랑이가 들어오는 경우도 빈번했습니다.

 

이는 평야가 발달하여 호랑이가 살기 힘든 중국과 호랑이가 존재하지 않는 일본과 비교하였을 때 확연히 틀리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리, , 표범등 멧돼지는 명함을 못내밀 정도의 맹수들이 한반도 곳곳에 서식하였고 이러한 맹수들로 인한 재산, 인명피해는 극심하였습니다.

 

 

거기에 설상가상 조선 후기에는'소빙하기'라는 지구 전체가 추워지는 시기가 있었으며 이는 여러 딜레마를 낳게 됩니다.

 

만약에 지구의 기온이 1도가 내려가게되면 강수량이 줄어들어 기근이 극성을 부리며 겨울이 길어지게됩니다.

 

그리고 기근에 계속되면 식물에도 영향이 가며 이는 인간과 자연계에도 영향을 줍니다.

 

인간은 가뭄이 들어 먹을거리가 없어지면 면역력이 약해지고 그로인하여 전염병이 돌게되는 문제가 생기지만,

 

자연계에는 식물이 자라지 않아 초식 동물이 줄어들고 이를 먹이로 하는 맹수들도 덩달아 살기 힘들어지는 문제가 생깁니다.

 

 

특히 호랑이는 최상위 포식자로 기근이 들었을때 먹잇감인 초식동물들의 수가 줄어들어서 결국 만만한 사냥감인 사람을 습격하는 경우가 빈번하게됩니다.

 

실제로 소빙하기 시기 당시 호환을 당한 기록이 상당수 존재한 것으로 보아 이 점도 무시 못할것으로 봅니다.

 

 이렇게 되니 민간에서는 맹수의 습격을 막으면서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조총을 구비해놓은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조총은 실록에서도 '어린아이가 항우를 대적 할 수 있게 하는 병기'라고 평가하였을 만큼 다루는 것도 쉽고 위력도 좋았기에 인조대 당시부터 민간에서 조총을 구할수 있었고 이러한 맹수들의 피해를 대비하기위해 조총을 구비하는 경우가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호환은 호환마마라고 하여 홍역과 마참가지로 민간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를 막기 위한 여러 민간 신앙들도 있었고

지금은 사라진 민간 신앙들이 있었다고 봅니다.

 

저는 바로 이점에서 민간에 상당수의 총기들이 존재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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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본 상인이 마을을 지나다가

조총을 휴대한 무리들에게 갈취를 당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1901613일 일본 정부로 발신) ]

上件에 관한 報告書]

 公第79)

 이달 3密陽 勿禁店의 중앙 관문인 강정이라는 마을에서 화승총, , 창을 휴대한 폭도 약 19명이 우리 전신공 原岡茂吉의 통로를 차단하고, “그대는 일본 상인이겠지. 가지고 있는 금품을 내놓으라.”고 강요하고 또 총대로 머리, 기타를 구타하고 더더욱 폭행을 가하려고 하였다. 때마침 密陽 주둔 井川 헌병 상등병이 선로 감시를 마치고 물금 방면에서 歸署하던 도중 관문(밀양 물금의 중심에 건설하여 있는 관문으로 壬辰 때부터 존재하는 것이다.)앞에서 이 폭행을 보고 구조하기 위하여 전진하려고 했는데 이 폭도들에 의해서 말에서 끌어내려져 그 자리에서 격투를 했다. 그런데 문 안에서 나타난 2, 3명의 적도가 발포하기를 두 번, 또한 15, 6명이 조총, 기타의 흉기를 들고 井川의 전후를 포위하여 머리, 기타에 중상을 입혔다. 井川은 중과부적으로 도저히 생명을 보전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말에 올라타고 난을 피하려고 했는데 부상 때문에 졸도하여 드디어 인사불성이 되었다. 저항력이 없음을 보고 폭도는 井川이 휴대한 무기를 약탈하고 뒷산 쪽으로 달아났다. 그 후 부근의 한국인에게 구조되어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密陽屯遣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상의 내용을 川合 憲兵區 대장이 보고하였습니다. 그래서 만사 제쳐놓고 오늘 아침 本 公館에서 西村 경부와 순사 2명을 정세 시찰 겸 우리 행상인 보호를 위하여 출장 보냈으며 한편으로 부산 監理에게도 조회하여 두었습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이 지방에 당시 출몰했던 草賊 등속일 것입니다. 이미 지난달 16일 밀양군 관하 '소바라'라는 한 촌락에서 우리 상인 大岡卯平이라는 자가 강도에게 금품을 약탈당한 일이 있었고, 昌原 九龍鎬山에 폭도가 쳐들어와서 그곳의 광산주인 馬木健三 소유의 헛간에 밀어닥쳐 금품, 곡식, 기타 물품을 강탈하고 게다가 馬木 3명에게 중상을 입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추측하건대 이 폭도는 작년 梁山 지방에서 일어나 通度寺를 근거로 해서 부근의 郡村에 출몰하여 良家를 멋대로 약탈한 저 活貧黨餘類가 아닐까 짐작합니다. 물론 이 정도의 폭도는 일종의 草賊에 지나지 않으므로 별로 염려할 정도의 일은 아니겠지만 이 지방은 일본인 행상이 반드시 경유하는 街道이고, 특히 京釜鐵道會社에서는 현재 釜山鎭-勿禁 간 노선의 實測에 착수하고 있습니다. 초적이 더욱 횡행하고 일본인임을 알고서 위해를 가하는 거동이 사실로 나타난 이상은 선로 감시 이외에 헌병의 정원을 증원하여 음으로 철도 공사를 엄호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참고하시도록 즉시 前顯의 상황을 보고 드리는 바입니다. 敬具.

190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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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이 기록은 주한일본 공사가 일본 정부에게 직접적으로 발신한 기록이기에

거짓은 없다고 봅니다.

여기서 폭도들이라고 칭하는 사람들 20여명이 조총과 냉병기들을 휴대하고있었고 이를 제지하기위해 달려온 헌병과도 격투가 있었던 점을 보아 일부 사람들이 화승총을 가지고 상인을 습격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사용할수 있었을 정도로 1900년대 초반까지 조총이 존재하였다는 것도 알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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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록들을 모두 종합하여 본 결과,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조총이 들어오게 되고 인조대에는 조총이 저자에 팔릴 정도로 조총을 제작하는 기술자가 군영 뿐만 아니라 민간에도 존재하였으며,

 

조총의 수량이 충분하지 않아 징집의 성격이 강한 속오군이 스스로 조총을 가지고 올 경우 세금을 감해준다는 법령을 숙종대까지 가지고 있었고,

 

이와 관련된 행위(상번하는 군병이 조총을 가지고 고향에 가거나 가지고 오는 것을 허가하는 것과 조총을 저자에서도 팔수 있게 하는 것)들에 대하여

 

국가가 각 고을에서 월과(月課 - 매달마다 조총화약, 기타 군기(軍器)를 만들어 바치던 것.)등의 여러 가지 이유들로 민간의 조총에 대한 제작 및 판매를 묵인하였고 조선팔도에 조총이 흔하게 되었다.라는 이야기가 되어집니다.

 

최근에 한국경매 사이트에 올라온 세정의 조총 유물을 보게 되었습니다만,

이 유물들이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세정의 조총 총열에는 군영에서 제작이 되었다는 의미로 각 군영의 한자가 총열에 상감되어있는데 한정을 제외하고 그를 받쳐주는 총가는 투박하기에 그지 없습니다.

 

이는 아마 기존에 사용하던 총가를 대신하여 조총 총열을 그대로 두어 심지를 꽂아서라도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기록들에 대하여 참포수님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참포수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참포수의 답신 입니다.


위에 언급 한 내용 중  <숨겨둔 총기의 총가부분을 장작으로 사용 했다>고 하셨는데,

맞다고 봅니다.

왜?

그 당시 단속이 상당히 심하여 사용이 보편화(?) 되던 물건이라 피치 못하게 보관하였고,

메스콤의 불통과  계몽이 잘 안되어,단속 및 신고기간이 지난 줄도 모르고 보관하다가 후환도 두렵고 보관이 어려워 많이들 불쏘시개로 썼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그러다 부품들은 총가부분과 같이 유실되고 남은 총열은 철(鐵)인지라 처리가 용이 하지 않아 여러곳에 묻어 둔 것이라 생각되며, 대부분의 백성들은 재 활용(?)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나는생각하지만 재활용하겠다는 생각을 품은 사람도 없지는 않았겠지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강현씨의 말 처럼 조총의 부품들이 총열과 같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것 입니다.

재 활용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당연히 부속들도 총열과 같이 있어야 겠지만,

그렇지 않은 예가 바로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이유는 우리 민초들은 농경민족이라 유동도 적었고 흥이 많고 이웃 간에  즐기며, 화목하고 평화로운 것을 추구하는 민족이라 별난 사람이 별로 많지는 않았다고 봅니다^^